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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과 유마경(維摩經)

법상스님 유마경(維摩經) 공부

by 동파 2021.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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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서 만나는 주련  책을 집필하신

정암사 법상스님의 유마경 공부를 여기 올리옵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합니다.

 

불국품 佛國品 제1

 

如是我聞。一時。佛在毗耶離菴羅樹園。
與大比丘衆八千人俱。菩薩三萬二千。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비야리(毗耶離)의 암라수원(菴羅樹園, mraplivana)에서 대비구(大比丘)
8천인과 3만 2천 의 보살들과 함께 계셨다.

[강해 講解)
여시아문(如是我聞)은 부처님 말씀을 담은 경전의 첫머리에 거의 나오는 첫 문구로서
북방불교에서 유행되는 경전의 첫머리는 꼭 여시아문으로 시작을 하여
신수봉행(信受奉行)으로 끝맺음을 한다.
그러므로 여시아문은 관용구(慣用句)로서 그 지향하는 바가 뚜렷하기에 목적어(目的語)처럼
분명하게 쓰였다는 것을 알아 두어야 한다.

여시(如是)는 이와 같다는 표현이기에 곧 경전을 결집하는 이의 생각이 아닌 들은바 그대로
옮겨 온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기에 이는 부처님 말씀이라고 확증(確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시(如是)는 부처님의 진리를 털끝만큼도 손상하거나 흩뜨리지 아니하고
그대로 전한다는 엄숙한 표현이기에 이로써 일법(一法)이 성립되는 것이다.

아문(我聞)은 내가 들었다고 하는 것이니 이는 진리를 선양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아문’이라는 표현은 그냥 단순하게 내가 들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법을 부처님께 직접 들었다는 표현이기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선포하여 일법(一法)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이 없다는 직접적인 표현이다.

그러므로 여시아문이 되면 이는 상근기(上根機)에 해당하기에 옛 선사들은 법문은 여시아문을
알아들으면 이미 법문을 다 들은 것이라고 밝히신 것이다.

그렇다면 여시아문을 알아들으면 왜 상근기라고 하는가?
이걸 알아 두어야 한다.
여시아문을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비록 법은 ‘일법’이지만 이법(二法)으로 나누어져서 정법과
사법(邪法)이 있게 마련이고 이를 가르침으로 보면 권교(權敎)와 실교(實敎)로 나누어지게 되며
법화경(法華經)의 가르침에 의하여 문(門)으로 보면 본문(本門)과 적문(迹門)이 있게 되는 것이고
다시 부처로 보면 본불(本佛)과 적불(迹佛)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시아문은 상근기이고 그다음부터는 중근기나 하근기를 위한 법이기에 부처님은
일법의 진리를 우리가 알아차리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편을 설정하는 것이다.
까닭에 여기서 근기(根機)가 무엇인가를 알아 두고 넘어가야 이어지는 법문을 알아들을 수가 있다.

근(根)은 산스크리트어로 ‘indriya’라고 하는데 이는 지배적인 힘 또는 생장을 증장시키는 힘을
뜻하는 말이다. 만물이 생장하자면 식물은 뿌리가 있어야 하고 사람은 그 근원(根源)이 있어야
하기에 한자에서 뿌리를 나타내는 근(根)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어서 기(機)는 기틀을 말함이다. 여기서 기틀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일의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계기나 조건을 말한다. 그러므로 뿌리가 튼실해서 잘 자라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기는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이기에 여기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말함이다.

근기(根機)는 근기(根器)와 상통하는 표현이다.
큰 나무는 뿌리가 크기 마련이고 성인(成人)은 식기(食器)가 크기 마련이다.
이를 선종(禪宗)에서는 본성은 뿌리에 흔히 비유를 하고 그것을 작용하여 가지. 줄기. 잎. 꽃 등은
기(機)에 해당하는 것이다.

장자(莊子) 소요유편에 보면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수 없다.
한 잔의 물을 작은 웅덩이에 붓고 여기에다 겨자씨를 띄우면 배로 삼을 수 있겠지만,
술잔을 그곳에 띄우면 곧바로 가라앉을 것이다. 이는 물은 얕은데 배는 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법화경(法華經) 방편품에 보면 사리불이 부처님께 법화의 법을 말씀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사리불이 세 번이나 청하고 나서야 법을 설하게 되셨으니
이를 삼지삼청(三止三請)이라고 하는데 부처님께서 법화의 도리를 바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법을 듣고자 하는 대중들의 근기 때문이다. 근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상근기(上根機)는 일법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자이다.
중근기(中根機)는 일법에 대하여 의심이 있어서 긴가민가한 자이다.
하근기(下根機)는 일법에 대하여 부정하는 자이다.

이러한 연유로 하여 이를 세 부류로 나누어 보는 것을 삼정취(三定聚) 혹은 삼취(三聚)라고 한다.
그러므로 삼취는 중생들이 일법을 대함에 있어서 성취하는 능력을 세 가지로 묶은 것이다.

정정취(正定聚)는 부처님을 바르게 믿어서 성불로 가는 중생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에 해당하는 불자는 석가모니 부처 외에 다른 것을 찾지 아니하기에 번거로움이
없어서 법당에 한 분의 부처님만 봉안할 뿐이다.

사정취(邪定聚)는 부처님 법을 믿기는 믿지만 삿되게 믿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정취는 일법에
대하여 늘 의심을 하게 된다. 그러기에 정정취로 가는 예도 있고 부정취로 떨어지는 경향도 있기에
이러한 불자를 기로보살(岐路菩薩)이라 하거나 또는 믿음이 확고하지 못하여 생각이 많아서
신상보살(信相菩薩)보살이라고도 한다. 대부분 불자는 여기에 빠져서 이를 벗어나지를 못하기에
입으로는 성불을 말하지만 정작 찾는 것은 갖가지 보살 사상에 빠져 있다.
그러기에 법당에 들어서면 숱한 불보살을 봉안하여 기웃기웃하는 것이다.

부정취(不定聚)는 아예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거나 훼불을 하는 아주 못난 무리다.
도덕경(道德經) 제41장에 보면 소수의 뛰어난 사람들은 도를 들으면 이를 힘써 행하지만 약간의
사람들은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하며 의심을 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도를 들으면 크게 웃는다.
웃지 않으면 도가 되기에 부족하다고 하였다.

여기서 상사(上士)는 식자(識者)나 지식인을 말하므로 불교로 말하면 상근기(上根機)이다.
중사(中士)는 중근기(中根機) 하사(下士)는 하근기(下根機)이다. 물론 춘추전국시대에는 사(士)라는
의미가 정확하게 무엇으로 쓰였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글을 번역하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의견을 내놓고 있으나 그 맥락은 상통한다.
후일에는 사(士)의 의미가 장부(丈夫)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불교에서도 장부(丈夫)는 남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覺者)를 지칭하는 의미이다.
기독교에서도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노자는 상사, 중사, 하사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밝은 도는 어두워 보이고 도가 나아갈 때는 오히려 물러가는 것 같고 순탄한 도는
엉킨 실타래처럼 보이고 높은 덕은 텅 빈 골짜기 같고, 가장 결백한 것은 수치스럽게 보이고 넓은 덕은
오히려 부족해 보이며 확립된 덕은 구차한 모습이며 진실된 덕은 풀어져 보인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큰 형상은 귀퉁이가 없으며, 큰 그릇은 더디게 만들어지고, 큰 음(音)은 소리가 희미하며,
큰 물건은 아무 형태가 없는 것이다. 도는 모습을 감추고 있고 이름도 숨기고 있으므로 대저 도라고
하는 것은 다만 빌려주는 것으로 훌륭히 이룬다. 라고 하였다.

다시 법화경(法華經) 방편품에 보면 부처님께서 일법을 설하시려고 하자 5천 명이 법문을 듣지 아니하고
물러서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하근기의 용렬함을 나타낸 것이다.

여시아문으로 인하여 범성(凡聖)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중생이기에 범인(凡人)이라 하고 알아차리면 곧 성인(聖人)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시아문은 참된 도리를 일러주고자 함이니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라고 하는 당부이다.

법을 전하는 사문경남 김해시 한림면 시산리 270
정암사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