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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 김길웅 시인

겨울 앞에서

by 동파 2017.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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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한 발 앞서 입성하는 곳은 아무래도 시골일 것이다. 곤궁했던 시절엔 의외로 잰걸음이었다.
조 까끄라기 아니면 마른 나뭇가지 따위로 구들방 지피던 때라 갈바람이 인다 하면 야음을 틈타 코앞에 겨울이 와 있곤 했다.
 도시의 달동네엔 그나마 연탄이 언 몸을 녹였다. 도농의 격차는 예나 제나 고만고만하다.

시골서 나고 자라 모질이 겨울을 났던 내성(耐性) 덕에 혹한도 두렵진 않다. 한데 돈 주고 못 산다는 초년고생도 호사에 겨워
 한순간에 허물어진다. 연탄을 거쳐 가스가 들어오고 보일러로 방이 후끈거리자 추위에 강하던 몸에 밴 근기가 하루아침에
 빠져나간다. 버릇은 잠깐이다.

11월 소슬바람 기척이 났다 하면 보일러를 켜야 한다. 첫 추위에 몸을 사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문제가 생겼다.
요즘 서민들은 겨우내 보일러와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 형편이다. 퍽 하면 고장으로 서 버리질 않는가.
돌아가던 보일러가 시도 때도 없이 멎어 버리면 실내 기후대가 한대(寒帶)로 돌변하고 만다.
꼼짝 없이 하룻밤을 떨게 되니 심술보 감기가 가만있을 턱이 없다. 밤새 환자가 다 돼 있다.
이런 낭패가 어디 있을까.

날이 밝기를 기다려 보일러 기사님에게 하소연해 보지만, 대답이 미지근 털털하다. 현장이란다.
그 현장이란 게 어디 한두 군데라야지, 밤이 돼야 어떻게 가 보겠다고 하질 않나. 몸은 이미 동태가 돼 있지만, 통사정해 놓고
하릴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그야말로 일각이 여삼추다.

머릿속이 번쩍한다. 한때 서울에 살던 여름날, 백화점에 갔다 깜짝 놀란 일, 한여름에 겨울옷이 날개 달린 듯 팔리질 않나.
 그래, 미리 보일러 상태를 점검해 놓자 해, 10월 하순께 보일러를 켜 보기로 했다. 장장 사흘 동안.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11월의 마당에 나섰다 깜짝 놀랐다. 어느새 잎을 다 내려놓은 감나무에 눈을 주는 순간, 흠칫한 것. 나무는 어느새 겨울 앞에 서 있었다.
 벌써 낙엽으로 겨울나기에 몸을 추스른 게 아닌가. 무서리에 몸 움츠리며 발가벗을 용기가 어디서 났을까. 이쯤 되고 보니 사람이 나무
 앞에 낯 따가울 수밖에.마당 둘레를 휘둘러본다.
감나무가 발가벗는 낌새에 다들 잎을 내려놓기 시작이다. 단풍나무, 석류나무, 느릅나무, 매화나무, 앵두나무, 팽나무, 개나리, 무화과….
나무들끼리 나지막이 수런거리는 말소리가 귓전이다. 오랜 동안 이웃으로 살며 겨울나느라 동맹(同盟)이라도 한 걸까. 열외 없이 어깨
겯고 바람에 식어 갈 한 움큼 체온을 나눴을 테다. 함께 가자고, 어느 해의 겨울처럼 늘 그러는 거라고.

요즘 사람들, 근기는 어디다 뒀는지 참 섬약한 것 같다. 겨울이 처음으로 시작하는 시골에서 추위에 맞장 뜨며 자란 성장 이력에도,
 어른이 되고 풍요 속에 살면서 나 또한 한없이 유약해졌다. 사람 참 변덕스럽다는 생각에 고개 수그러든다.

묵연히 겨울 앞에 서 있는 나무들, 침묵할 뿐 한마디 말이 없다. 지난여름 전례 없던 폭염 앞에도 꾹 다물었던 입인 걸 겨울이라고
 무슨 말을 하랴. 시종 여상한 나무의 결기에 번쩍 정신이 든다. 나무만 못하랴 하면서 진즉 나무만 못한 게 사람 아닌가.
겨울 앞에서 체면이 말이 아니다.

설령 자신에게 잇속이 없다 해도 투덜대진 말아야 할 것을, 말 할 자리에선 말 않고 뒤에서 삼가야 좋은 말을 하는 사람들.
뿌리박아 평생 꼼짝 않되 자리에 연연 않는 저 덕에 어찌 닿을꼬. 내명(內明)한 현자(賢者)들이다.
겨울 앞에서 겨울로 가는 나무들에 눈을 떼지 못한다.
헌 옷가지 하나까지 홀랑 벗고 선 나목들,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하랴.
공연히 구시렁거리는가 하면, 미풍에도 휘청거리
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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