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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사우

松雲大師碑銘(송운대사비명)(땀흘리는 비석)

by 동파 2015.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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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雲大師碑銘(송운대사비명)
有明朝鮮國密陽表忠祠松雲大師影堂碑銘幷序 (유명조선국밀양표충사송운대사영당비명병서)
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 李宜顯 撰 (대광보국숭록대부령중추부사 이의현 찬)
嘉善大夫行弘文館副提學知製 敎 金鎭商 書 (가선대부행홍문관부제학지제 교 김진상 서)
大匡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 兪拓基 篆 (대광보국숭록대부행판중추부사 유척기 전)
粤我 昭敬大王在有之二十五年에 日本賊이 大擧兵入寇하여 主上이 鄙在西隋하니 
월아 소경대왕재유지이십오년에 일본적이 대거병입구하여 주상이 비재서수하니 
凶鋒이 彌滿八路하여 中外食焉者多雉兎逃하고 賊遂肆意蹂躪이라 維時에 松雲大師惟政은 
흉봉이 미만팔로하여 중외식언자다치토도하고 적수사의유린이라 유시에 송운대사유정은 
佛者流也라飛錫入高城하여 諭賊勿嗜殺하니 賊見其儀容 凜然卽起敬하여 戒基徒하니 
불자류야라비석입고성하여 유적물기살하니 적견기의용 름연즉기경하여 계기도하니 
由是로 領東九郡이 得免屠戮之慘이라 旣而慷槪語諸僧曰 吾等의 優游飮啄은 皆聖恩也라
유시로 영동구군이 득면도륙지참이라 기이강개어제승왈 오등의 우유음탁은 개성은야라
今國危至此어늘 坐視不救 可呼아하고 乃募衆至數百하여 亟赴順安하니 時에 師之師休靜이
금국위지차어늘 좌시불구 가호아하고 내모중지수백하여 극부순안하니 시에 사지사휴정이
方總諸道僧兵타가 辭以老하고 擧師自代어늘 遂從體察使柳成龍 協同天將하여 破平壤賊하고
방총제도승병타가 사이로하고 거사자대어늘 수종체찰사유성룡 협동천장하여 파평양적하고
隨都元帥權慄下嶺南하여 婁有斬獲하니 進階堂上하고 使隨劉總兵綎하여 入倭營諭意淸正할세
수도원수권률하영남하여 루유참획하니 진계당상하고 사수유총병정하여 입왜영유의청정할세
三往三返에 盡得要領이라 正이 門 「朝鮮에 有寶乎아」 曰 「無有오 寶在日本하고 
삼왕삼반에 진득요령이라 정이 문 「조선에 유보호아」 왈 「무유오 보재일본하고
若頭是也」라 하니 正이 色沮러라 
약두시야」라 하니 정이 색저러라 
及還에 上이 召至內闥하여 歷問事情하고 仍 敎曰 「昔에 劉秉忠 姚廣孝는 俱以山人으로
급환에 상이 소지내달하여 력문사정하고 잉 교왈 「석에 유병충 요광효는 구이산인으로 
勳在國家 하니 爾若長髮이면 百里之寄와 三軍之命이 無所不可라」한대 師辭以不 敢커늘
훈재국가 하니 이약장발이면 백리지기와 삼군지명이 무소불가라」한대 사사이불 감커늘
上亦不屈其志하고 特給武庫鎧杖하여 俾抄擊餘賊이러니 已又助築城埤할세 
상역불굴기지하고 특급무고개장하여 비초격여적이러니 이우조축성비할세 
飭儲胥完保障하고 卽上印綏하여 抗章乞休호대 不許하니라 丁酉에 倭再逞커늘 
칙저서완보장하고 즉상인수하여 항장걸휴호대 불허하니라 정유에 왜재령커늘 
從麻劉二督府하여 具有勞勩일세 特陞嘉善하여 拜同知中樞하고 辛丑에 又築釜山城하니라 
종마유이독부하여 구유로예일세 특승가선하여 배동지중추하고 신축에 우축부산성하니라 
甲辰에 奉國書하고 往日本하니 諸倭 相顧驚憚하여 受約束惟謹이라 
갑진에 봉국서하고 왕일본하니 제왜 상고경탄하여 수약속유근이라 
還被虜男婦三千餘口하고 復 命에 加階嘉義하고 優錫賚以獎之하니라 是後年益老하여 
환피로남부삼천여구하고 복 명에 가계가의하고 우석뢰이장지하니라 시후년익로하여 
乞骸하고 自雉嶽으로 入伽揶山이라니 至庚戌秋하여 示寂하니 世壽六十七이요 
걸해하고 자치악으로 입가야산이라니 지경술추하여 시적하니 세수육십칠이요 
僧夏五十七이라 茶毘之夕에 得舍利一具하여 藏之石鍾하고 建窣堵波하니라 師는 豊川任氏也니
승하오십칠이라 다비지석에 득사리일구하여 장지석종하고 건솔도파하니라 사는 풍천임씨야니
父守成이 娶達城徐氏하여 生師於嘉靖甲辰하니 幼有異質하고 稍長讀書 타가 忽有契悟하여
부수성이 취달성서씨하여 생사어가정갑진하니 유유이질하고 초장독서 타가 홀유계오하여
投黃嶽山薙髮하고 字曰離幻이라하고 才思夙詣하여 爲蘇齋 思菴 高峯 霽峰諸名公所賞識하고
투황악산치발하고 자왈리환이라하고 재사숙예하여 위소재 사암 고봉 제봉제명공소상식하고
與詩人崔嘉運許美叔 林子順 李益之輩로 遊하여 爲詩에 
여시인최가운허미숙 임자순 이익지배로 유하여 위시에 
淸酒可觀이라 有泗溟集하여 行于世나 然이나 斯皆師之土苴粃糠이라 余固不足道也오 
청주가관이라 유사명집하여 행우세나 연이나 사개사지토저비강이라 여고부족도야오 
唯是稟氣豪逸하고 自有達識明智하여 從異敎而不爲其敎所囿하고 出世而懷弭亂之志하며 
유시품기호일하고 자유달식명지하여 종이교이불위기교소유하고 출세이회미란지지하며 
離倫而篤衛國之誠하고 當賊勢潮驅하여 雰雺迊天일세 忠義鬱律을 不能自禦하여 
이륜이독위국지성하고 당적세조구하여 분몽잡천일세 충의울률을 불능자어하여 
片言이 折伏群醜하고 尺劍이 建立殊績하니 有不可以談空說幻之一枯禪으로 比而倫之로다 
편언이 절복군추하고 척검이 건립수적하니 유불가이담공설환지일고선으로 비이륜지로다 
聖敎에 引古英傑策勉者蓋亦深知其抱負之不常則 豈不爲一時之毅夫蓋代之 衛男也哉아
성교에 인고영걸책면자개역심지기포부지불상즉 기불위일시지의부개대지 위남야재아
嶺南之密陽에 有表忠祠하니 以享師而休師는 以有最初勘難之功하고 靈圭는 以殲賊著烈하여 
영남지밀양에 유표충사하니 이향사이휴사는 이유최초감난지공하고 영규는 이섬적저열하여 
終又殉節하고 與師並餟이러니 肅宗朝命官供祭需하고 當宁 又命給復하니 所以樹風聲勸來後也라
종우순절하고 여사병체이러니 숙종조명관공제수하고 당저 우명급복하니 소이수풍성권래후야라
師嘗存髥不去하여 其長이 至帶하니 亦異矣라 
사상존염불거하여 기장이 지대하니 역이의라 
今遺像이 留在祠中하니라 余雅不喜爲釋子作文字하여 有來請이면 輒麾之로대 唯師事 
금유상이 유재사중하니라 여아불희위석자작문자하여 유래청이면 첩휘지로대 유사사 
跡은 絶奇하여 義難一例斥却일세 遂爲之銘하니 其詞에 曰 人有五倫에 一則君臣이로다 
적은 절기하여 의난일례척각일세 수위지명하니 기사에 왈 인유오륜에 일즉군신이로다 
臨難奮義에 有國無身이로다 斯爲正理요 名敎攸遵이로다 呪梵持鉢은 佛也匪人이나 
임난분의에 유국무신이로다 사위정리요 명교유준이로다 주범지발은 불야비인이나 
獨守공門하여 自甘夷淪이로다 視世危亂하고 寧肯嚬呻가 偉哉松雲은 跡幻心眞이로다 
독수공문하여 자감이륜이로다 시세위란하고 녕긍빈신가 위재송운은 적환심진이로다 
存髥至술하고 有燁精神이로다 想厥雅意호니 不屑緇紳이로다 蠻警卒起에 誓淸氛塵이로다 
존염지술하고 유엽정신이로다 상궐아의호니 불설치신이로다 만경졸기에 서청분진이로다 
裒兵選徒에 師律一新이로다 楡岾救衆에 化彼兇嚚이로다 九郡安帖하여 全活惟均이로다 
부병선도에 사률일신이로다 유점구중에 화피흉은이로다 구군안첩하여 전활유균이로다 
西山讓先하니 困徹重新이로다 歷載從戎에 箕疊鼎津이로다 鹵獲侯多에 特侈緋銀이로다
서산양선하니 곤철중신이로다 역재종융에 기첩정진이로다 로획후다에 특치비은이로다
釜營三返에 尤竭忱恂이로다 說寶語壯에 氣薄秋旻이로다 以舌代鋒하여 遠懾强隣이로다 
부영삼반에 우갈침순이로다 설보어장에 기박추민이로다 이설대봉하여 원섭강린이로다 
七年兵戈에 功在南民이로다 聖情眷이하여 諭敎諄諄이로다 
칠년병과에 공재남민이로다 성정권이하여 유교순순이로다 
曰昔劉姚는 勳比麒麟이로다 爾能屈志하여 佑我昌辰이로다 百里三軍은 嘉命可申하니 
왈석유요는 훈비기린이로다 이능굴지하여 우아창진이로다 백리삼군은 가명가신하니 
師拜稽首하여 其敢逡巡가 臣老無能하여 願垂慈仁이로다 祗林道場에 猿鳥相親이
사배계수하여 기감준순가 신로무능하여 원수자인이로다 지림도장에 원조상친이
是臣本懷니 困款畢陳이로다 翩然歸臥에 雉嶽嶙峋이로다 
시신본회니 곤관필진이로다 편연귀와에 치악인순이로다 
恩槳주疊은 表節之純이로다
은장주첩은 표절지순이로다
毫光遽비하니 法運終湮이로다 塔廟湧공에 玄珠示珍이로다 凝川報祀에 永綏千春이요
호광거비하니 법운종인이로다 탑묘용공에 현주시진이로다 응천보사에 영수천춘이요 
遺像在堂하니 爽氣氳氤이로다 給需賜復하니 寵章式頻이로다 惟此一着은 蓋飭戎袀이니 
유상재당하니 상기온인이로다 급수사복하니 총장식빈이로다 유차일착은 개칙융균이니 
非如前代의 渠敎是因이로다 三師薺享에 共作主賓이로다 酬功彰烈하여 施及無垠이로다 
비여전대의 거교시인이로다 삼사재향에 공작주빈이로다 수공창렬하여 시급무은이로다 
我述其事하여 刻之貞珉이로다 爰俾鶖子로 師義寔循이로다 毋泥虛寂하고 追師濟준하라
아술기사하여 각지정민이로다 원비추자로 사의식순이로다 무니허적하고 추사제준하라
崇禎後再壬戌 十月 日立 
숭정후재임술 시월 일립

 

(해설)

우리선조 임금 25년에 일본놈들이 많은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옴으로 선조는 서북 신의주 변방으로 피난하시고 흉봉이 팔도에 침입함에 안 밖으로 국록을 먹는 자들은 꿩이나 토끼처럼 도망하니 적은 드디어 우리나라를 마음대로 짓밟았다.

이때 송운대사 유정은 불교를 닦고 있었는데 석장을 집으시고 고성에 들어가서 적에게 살생을 즐기지 말라고 타이르니 적이 대사의 그 위엄이 늠름하신 것을 보고는 곳 일어나 공손히 절하고 그 무리들을 훈계하니 이로 말미암아 영동구군은 비참을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그 후 유정은 강개한 어조로 모든 스님에게 말하기를 지금 우리들이 잘살고 있는 것은 모두 임금의 덕택이며 나라의 위태함이 이에 이르렀거늘 어찌 앉아서 보기만 하고 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시고 곧 수백명을 모병해 가지고 급히 순안의로 달려갔다. 이 때에 송운대사님의 스승인 휴정은 팔도도청성에 임명되어 있었으나 늙었으므로 사퇴하고 사명대사를 천거하여 자기의 대로 하니 드디어 유성룡을 따라 명나라 장수와 협동하여 평양적을 파하고 도원수 권률을 따라 영남에 내려가 수차 적을 참획하였으므로 임금께서 감탄하시어 당상관을 제수하시고 유총병정을 따르게 하였다.

 

그리고 왜영에 들어가 청정을 개유하였는데 세번 왕복하여 그 요령을 얻은 것이 많다.

 

청정이 조선에 보배가 있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없다. 보배는 일본에 있으니 네 머리가 바로 그것이다 하니 청정의 낯빛이 창백했다 한다. 돌아오는 임금이 내당에 불러 정탐한 왜적의 정세를 낱낱이 묻고 곧 전교하기를 옛날에 유병총과 요광효는 모두 산인으로써 국가에 공훈이 많더니 너도 만일 머리를 기르고 속인이 된다면 백리의 땅과 삼군의 명을 무엇이든지 맡기리라 하셨으나 대사는 감히 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그 뜻을 굽힐 수 없으므로 특히 갑옷과 무기를 내리어주고 남은 적을 치게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또 성을 쌓고 한편으로는 군량미와 병기등을 굳게 보완하고 곧 인수를 올려 나이가 많으므로 쉬기를 원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정유년에 왜적이 다시 침입합에 대사는 명나라에서 새로 들어온 마귀와 유정을 따라 갖은 포악을 해온 왜적을 평정하였다. 임금께서는 특별히 가선대부에 올려 동지중추부사에 임명하였다. 신축년에 또 부산산성을 쌓고 갑진년에는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가니 모든 왜놈이 서로 돌아보고 놀래며 두려워하였다. 오직 삼가겠다는 약속을 받고 남녀 삼천 수백명을 데리고 와서 임금께 복명하니 임금께서 칭찬하시고 가의대부에 올리고 말과 옷감 등을 내리어 포장하였다. 그후 대사는 나이가 많으므로 사직하고 치악산에서 가야산에 들어가 경술년 가을에 별세하였으니 세수 67이요 중 나이 57이다.

 

장사하던 날 저녁에 사리 한 구루를 얻어 석종에 간직하고 도파를 세웠다. 대사는 풍천 임씨이며 아버지 수성이 달성서씨에게 장가드시어 가정 갑진년에 대사를 낳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차차 자라 글을 읽다 홀연히 깨닫고 황악산에 들어가 머리를 깍았다. 자는 이환이라한다. 재주가 일찍부터 뛰어나니 소재, 사암, 고봉, 제봉같은 여러 높은 사람들과도 잘 알게 되고 또 시인 최가운, 허미숙, 임자순, 이익지 등과도 시로써 놀게 되는데 시를 주고 받고 하는 것이 훌륭하였다. 사명집이 있어서 세상에 간행되어 있으나 이것은 모두가 대사의 한 찌꺼기만 남은 것이며 진실한 것은 볼 수 없어 정녕 말할 것이 못된다. 오직 품기가 호일하고 사리에 달관하는 식견이 있고 지혜에 밝았다.

 

불교에 쫓았는데 그 교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세상에 나와서 난리를 그치게 할 뜻을 품었으므로 인륜을 떠났으나 나라를 지킬 성심이 돈독하여 적의 세력이 조수와 같이 밀려들어 온 나라가 어지러운 때 명나라 장수들을 맞으되 능히 막지 못한것을 한마디 말로서  왜를 굴복시키고 한자의 칼로서 뛰어난 공훈을 세우니 공(불교)을 말하고 환(불)을 말하는 한 중에 비할 바 아니다. 임금께서도 옛날의 영걸에 비교하여 그 포부가 보통이 아닌 것을 잘 알 수 있으니 어찌 한 시대의 의부가 되고 한 시대의 위대한 인물이 아니겠는가. 영남 밀양 표충사(表忠祠)에서 사명대사를 향사하는데 휴정대사는 처음에 난을 감당한 공이요. 영규는 적을 섬멸한 공이 현저하고 또 순절하였으므로 대사와 함께 향사한다. 숙종대왕때 명령을 내리어 제수를 관에서 주었고 지금 임금께서 또 명하여 복호를 주니 이것은 아름다운 풍속을 후세에 권장하는 까닭이다. 대사는 일찍이 수염을 깍지아니하고 그 길이가 띠에까지 이르러니 또한 훌륭하였다. 지금 유상이 표충사(表忠祠) 영당에 있다. 내가 본래 중에게 문자지어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글을 지어 달라는 청이 오더라도 거절하였으나 오직 대사의 사적은 특히 훌륭하고 뛰어났으므로 참아 의례상으로 다른 것과 같이 물리치지 않고 드디어 새기게 되니 그 말에 이르기를 사람에게 오륜이 있으니 첫째는 군신이다. 전쟁에 나아가 의를 위해 분기하니 나라는 있고 몸은 없었다. 이것이 정리요 명교를 따르는 바이로다.

 

서를 읽고 바릿대를 가지면 부처이요 사람은 아니다. 홀로 절만 지키고 불경만 읽고 있는 것이 보통인데 세상의 위란을 보고 어찌 가슴 속에만 신음할 것인가. 거룩하다 송운은 행동은 환이요 마음은 진이다. 수염이 무릎에 이르니 그 정신이 더욱 빛났다. 그 본 뜻을 생각하니 중의 의관에 만족함이 아니로다. 임진왜란이 졸지에 일어났음에 난리를 밝히겠다 맹세하고 군사를 모으니 무리를 뽑으니 군사의 규률이 새로워졌다. 유점사에서 중생을 구제하니 감화가 왜적에도 미쳐서 아홉 고을이 편안 하니 사람들을 고루 살린 것이다. 서산이 먼저 하기를 사양하고 임금에게 알리더라. 군사지낸 대를 생각해보니 평양과 정진이다. 노획이 곱이나 많으니 바단과 은이 융숭하였다. 부산 적영에 세 번이나 갔다 올 때는 정성을 들여 힘을 다하였고 보배를 말할 때는 그 말이 장하였으니 기운이 가을하늘을 덮었다. 혀로서 칼날을 대로하니 멀리 강한 이웃이 항복하였다.

 

칠년전쟁에 공이 백성에게 있었도다. 임금이 갸륵하게 생각하고 교서를 내려 순순히 이르기를 옛날 유병충과 요광효는 그 공훈을 기린에 비함직하니 너도 능히 뜻을 굽혀 속세에 나와 나를 도운다면 백리의 땅과 삼군을 맡기겠다 하였으나 스님은 절하고 이마 숙이고 감히 할 수 없나이다. 신은 늙어서 무능하오니 바라옵건데 인자하심을 드리우시와 다만 산 속에 들어가 잡나비와 새, 짐승과 서로 친하게 해주시면 이것이 신의 본뜻이라고 지성으로 아뢰고 편안히 돌아와 치악산에 들어갔다.

 

혜와 상을 거듭 내리니 표절이 순수한데 호광이 갑자기 살아지므로 법운이 마침내 기울어졌다. 탑묘는 공중에 솟았고 현주는 진귀함을 보았다. 밀양 무안에 있는 표충사(表忠祠)는 천추에 길이 편안할 것이다. 유상이 사당에 있으니 상쾌한 기운이 고요히 서렸도다. 오직 이와 같이 포장하는 것은 대개 제사받들기를 신칙하여 이전과 같이 하지 아니하니 그 가르침이 이에 인함이요, 삼대사를 함께 향사하니 서로가 주빈되게 함이로다. 공에 보답하고 의렬을 들어냄이 깊이 후세에 미치게 하였다. 내가 그 일을 쓰고 정민에 새김은 스님들로 하여금 스승의 의리를 따르게 함이니 공허한 적막 속에 빠지지 말고 스승을 따라 환난을 구제할 것이다.

 

영조 18년(1742년) 10월에 세우다

 

 ***여기 탁본 비문은 평택저축은행에 소장되어 있으며 비문에 대한 글을 검색하여 오던중 번역이 있기에

옮겨 놓았습니다. 혹시 저작권이 있다는 연락을 주시면 삭제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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