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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세월호 진도에서 대참사(大慘事)

by 동파 2014.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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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4.17 03:02

<조선일보 사설>

오늘은 조선일보의 사설 기사를 읽어봅시다.

"여객선 慘事,이러고도 선진국 되겠다는 말 나오나..." 

믿기 어렵고, 믿고 싶지 않은 대형 해상(海上) 참사가 발생했다. 승객과 승무원 462명을 태우고 인천에서 제주로 가던 청해진해운 소속 여객선 세월호가 16일 오전 8시 55분쯤 전남 진도군 병풍도와 관매도 사이 바다에서 좌초한 후 침몰해 이날 밤 현재 사망자가 5명 나왔고 282명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93년 10월 전북 부안 격포 앞바다에서 사망자 292명을 낸 서해훼리호 침몰 사건 후 21년 만의 참변(慘變)이다. 세월호에는 제주도로 3박 4일 수학여행을 가던 경기 안산시 단원고 2학년생 325명과 교사 15명의 단체 승객이 타고 있었다. 실종자 상당수는 가라앉은 배의 선실·식당 등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고 직후만 해도 이렇게 엄청난 인명 피해가 날 것이라고는 예상할 수 없었다. 세월호는 좌초(坐礁) 후 선체가 왼쪽으로 90도 기울긴 했지만 2시간 반 가까이 떠 있었다. 해경·해군은 구조 선박 수십 척과 헬기 18대를 보내 구조 중이라고 했고, 일부 구조 장면이 TV에 방영되기도 했다. 경기도교육청은 오전 11시 넘어 학부모들에게 '단원고생 전원 구조'라는 문자 메시지까지 보냈다. 하지만 오후 들어 구조 인원 집계에 착오가 생겼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안전행정부와 해경이 실종자 숫자를 수정해 발표하는 등 우왕좌왕했다.

세월호는 인천~제주를 오가는 6825t급으로 정원이 920명이나 되고 차량 180대와 컨테이너 150개를 선적(船積)할 수 있는 대형 여객선이다. 게임룸·레스토랑·샤워실도 갖추고 있다. 운항사인 청해진해운 측은 '국내 최대 크루즈 선박'이라고 홍보해왔다. 이렇게 큰 배가 두 시간 넘게 떠 있었는데도 300명 가까운 실종자가 나왔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바람도 강하지 않고 파도도 잔잔한 편이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황당한 건 여객선이 '꽝' 하는 충격을 받고 기울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선내(船內) 방송이 '승객들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라'고 반복해 안내했다는 사실이다. 재빨리 구명조끼를 입고 선실에서 나왔던 사람은 대부분 구조됐다. 승객 몇 백 명이 선체와 함께 가라앉았지만 선장과 선원은 대부분 살아 나왔다.

정확한 사고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무리한 항로(航路)를 택한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사고 여객선이 침몰한 지점은 전남 신안군·진도군의 섬 밀집 해상에서 병풍도·관매도·맹골도·송도 등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서쪽으로 몇 ㎞ 가서 활처럼 굽은 노선을 택하면 섬들 사이를 곡예하듯 항해할 필요 없이 수월하게 제주도를 오갈 수 있다. 세월호는 당초 전날 오후 6시 30분 인천항을 출발해 16일 오전 8시 제주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서해에 짙은 안개가 끼는 바람에 인천항 출항이 오후 9시로 늦춰졌다. 그러자 제주항 도착 시각을 무리하게 맞추기 위해 섬들 한복판을 관통하는 직선(直線) 노선을 선택한 건 아닌지 하는 것이다. 세월호는 선장이 휴가 가는 바람에 대리 선장이 몰았다고 한다. 수사 당국은 노선 선택이나 대리 운항이 사고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확실히 규명해야 한다.

이번 세월호 사고는 1993년 10월의 서해훼리호 침몰 사건과 비교해볼 때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사고였다. 서해훼리호는 110t으로 세월호의 60분의 1밖에 안 되는 크기였고, 정원이 207명인데 362명이나 타고 있었다. 화물도 과적(過積) 상태였다. 반면 세월호엔 정원의 절반도 타고 있지 않았다. 서해훼리호 침몰 땐 초속 10.5m의 강한 바람에 파고도 2m나 되는 등 기상 상태도 나빴다. 세월호는 파고가 0.5m로 잔잔한데도 침몰하고 말았다. 서해훼리호는 배가 뒤집힌 후 10분 만에 완전히 가라앉았지만 세월호는 두 시간 반이나 떠 있었다. 그런데도 두 사고의 인명 피해는 큰 차이가 없다. 세월호의 운항부터 구조(救助) 과정에 이르기까지 뭔가 말도 안 되는 실수와 과실들이 겹쳤을 것이다.

1990년대 초·중반엔 서해훼리호 사고 말고도 성수대교 붕괴(1994년·32명 사망), 대구 지하철 가스 폭발(1995년·101명 사망), 삼풍백화점 붕괴(1995년·501명 사망) 등 후진국형(型) 사고가 잇따랐다. 서해훼리호 사고가 일어난 1993년의 국민 1인당 GDP는 8422달러였다. 재난으로 뒤범벅된 1990년대를 한 해 한 해 넘길 때마다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올라서기가 이렇게 힘드냐는 한탄이 쏟아졌다.

올해 우리 1인당 GDP 전망은 1993년의 3배 정도인 2만6000달러이다. 거의 선진국 문턱까지 도달해 있고, 분야에 따라서는 우리가 세계 최고라고 자랑하는 것이 적지 않다. 조선(造船) 분야만 해도 건조 물량과 기술에서 세계 1위 수준에 올라섰다. 그러나 '세계 1위'라는 번드르르한 포장을 걷어내고 나면 그 안의 알맹이가 어떤 수준인지 세월호 사고가 여실히 보여줬다. 정부는 실종자 집계 하나 제대로 못 해 허둥댔다. 선박·휴대폰·자동차 같은 물건을 제조하는 기술은 일류가 됐지만 그 물건들을 다루는 소프트웨어는 여전히 후진국 수준이다. 국민들은 무엇보다 이번 참사를 통해 대한민국은 인간의 생명(生命)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나라가 아닌가 하는 기분을 뼛속 깊숙이 느끼게 됐을 것이다. 이대로는 선진국이 되기도 힘들다. 설령 경제적으로는 선진국 대열에 올라선다고 해도 국민 의식과 사회 제도·관행이 지금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이번보다 더 끔찍한 비극들이 앞으로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오빠가 구명조끼 입혀 줬어요!"

"엄마,아빠 어디있어요?"

구사일생 살아난 권지연양(6살)

 





출처 : 동산불교대학37기
글쓴이 : 동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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